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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과 일상언어-'주변부 선학'의 중요성--'주변부 선학'의 중요성- 2001-04-19 오후 10:41:12
해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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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과 일상언어
-'주변부 선학'의 중요성-
박영록 (충주대 중국어과)
1. 머리말
1.1 연구의 요약
'선' 혹은 '선수행'과 '선학'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선학'은 단일의 연구대상이나 방법론에 국한되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 이 글의 기본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가지 연구 방향 중에서 '일상언어'와 관련하여 그 언어적 표현 및 연구방법론을 선문헌의 연구에 적용시켜 보려는 것이 이 글의 주요 구조이다. 이런 연구는 '정통' 선학의 관점에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될 부분인 듯 한데, 나는 이처럼 '부차적'인 연구를 '주변부 선학'이라 부르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주변부에 대한 인식이 '선'과 '선학'의 관계 및 '선학'의 역할과 한계를 확정하는 것에 일정한 작용을 할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1.2 문제제기
조계사와 불교신문사에서 공동 주최한 "간화선대토론회"에서 <간화선 수행과 공안공부의 문제>에 대해 약정질의자로 나선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첫째. 선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또는 선 수행에 있어서 윤리도덕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둘째. 천태선, 묵조선, 간화선 등 여러 형태의 선 수행이 있는데 그 세계관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셋째.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연기법이라 하는데 반해 선사들은 본래면목(불성, 자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내용적으로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이라면 왜 다른 개념들을 사용했는지?
넷째. "화두는 분별심을 타파하는 무기"라고 했는데 오늘날 간화선 수행자들에게 오히려 편견, 독선, 편협, 배타, 이기의 분별심이 더욱 견고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다섯째. 선에서는 '교외별전'을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불교와 선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불교와 선은 무관한 것인가. 같다면 왜 '교외별전'이라 했는가?
내가 중시하고자 하는 것은 이에 대한 발표자의 답변이 아니라 이런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런 질문들은 흔히 '선의 본질'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 쉬운 것들이며, 아울러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기성품으로 답변이 대략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속제와 진제 혹은 평등계와 차별계를 혼동하지 말라거나 상대의 근기나 상황에 따라 다르다거나 본질은 같은데 중생들이 차별심을 내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다는 등등. 이런 상황을 도법스님이 모를 리 없다고 보면 위의 질문들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학술토론형태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3 선학의 두 가지 함의와 주변부 선학
'선학'이란 용어는 대체로 두가지 함의를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선공부', '마음공부', '선수행' 등의 의미로 '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에 관한 학문적 논의"로서의 '선학'이다. 물론 '마음 공부'로서의 선학과 학문적 논의로서의 선학이 대개 동일 인물에 의해 추진되고 목적 또한 기본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선학'의 이러한 두 가지 함의는 별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동국대학교 '선학과'라는 학과명칭은 이러한 두 함의가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의 한계가 명확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수행'과 '학문'은 이미 구분되어야 할 성질이므로 양자의 함의에 대해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선, 언어, 선학>에서는 '좋은 선학'에 대해 '선체험으로 이끄는 효용성에 가치를 두며, 선의 체험에 도움이 될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발표회장의 많은 분들이 동조하였으므로 이것을 '중심부 선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에 반해 선체험에 직접 효용성은 갖지 않고 논리적인 정리, 분석 및 언어학, 경제학, 사회학, 종교학 등 여타 학문분야와 연접하여 연구하는 것을 '주변부 선학'이라 부르자는 것이다.
2. 선어록과 일상언어
2.1 일상언어의 담화구성법
우리가 어떤 단어나 문장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담화 속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어법'이라는 단어를 보자. 이것의 사전적인 의미는 대략 이러하다.
표현하려는 본 뜻과는 반대 되는 말을 함으로써 문장의 변화 효과를 한결 높이려는 표현법
그러나 실제로 위처럼 말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예를 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학생 : '반어법'이 뭔가요?
교사 : 야, 고등학생이 반어법도 모르고, 너 참 똑똑한 학생이구나. 이게 반어법이야.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내가 돌 지난 우리 애기에 사과와 포도 그림을 가져다 놓고 '포도'라고 했을 때 애기가 '포도'를 지적하면 성공이다. 하지만 내가 식사 후에 '포도'를 먹고 싶어 '포도'라고 하는데 애기 엄마가 포도를 지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코메디'이거나 '포도를 가져다 주기 싫다'는 또 다른 의사표현인 것이다. 즉, 어떤 단어나 문장은 단순히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맥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용법을 아는 것이 곧 그 단어와 문장을 '안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어록 연구에 있어서는 이런 사정들이 간혹 간과되고 있는 듯하다. <선, 언어, 선학> 중에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원문 인용부분] 오조법연(五祖法演)은 어느날 진제형이라는 거사에게 말했다.
"제형은 어린 시절에 [소염시(小艶詩)]를 읽어본 적이 있소? 그 시 가운데 다음 두 구절은 제법 우리 불법(佛法)과 가까운 데가 있습니다. <소옥아! 소옥아! 자주 부르지만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낭군이 목소리 알아듣기를 바랄 따름이다.>" ……
[발표자 해설부분]…… 여기서 법연이 잘 살펴보라고 하는 부분은, '소옥아! 소옥아!' 하고 부를 때 낭군이 알아듣는 것은 '소옥'이라는 의미관념이 아니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것①이다. 즉 말을 듣고서 그 말의 의미관념을 따라가지 않고②, 현상으로서의 그 말이 생겨나는 근원을 파악함이 곧 불법(佛法)이라는 것③이 법연의 가르침이다. ……
물론 윗 글의 저자가 명확하게 '일상언어'와 법연의 '선어'에 대해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③에서 '불법'을 제기하는 것으로 볼 때 ②가 일반인들의 이해방식인 동시에 일상언어적인 이해방식이며, ①과 ③을 선사들의 이해방식이라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언어'의 '일상'을 어디까지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범위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특정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면 '일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렇게 볼 때 사실 ①, ③ 역시 언어에 대한 일상적인 이해 방식일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위 경우에 양귀비가 '소옥아, 소옥아'하고 부르는데 '낭군 (안록산)'이란 사람이 '귀비가 소옥이를 부르는군'하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일상적인 언어 소통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상언어에서 '어휘의 의미관념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아내 : 여보, 에어컨 좀 틀어줘요.
남편 : 음, 기름이 좀 달랑거리는데...
(두 남학생의 대화 )
A : 오늘 월드컵 예선전 구경하러 갈까?
B : 여자 친구가 음악회 티켓을 끊어 놨어.
(6) (두 친구의 대화)
A : 어제 잃어버린 샤프 찾았니?
B : 으응, 하나 샀어.
위 여러 경우 모두 선행화자의 질문이나 요구에 직접 응답을 않고 있다. 하지만 위 경우에 대답이 안되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일상언어에는 '직접적인 대답'은 감정을 자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상식이고, 위처럼 '동문서답'형식으로 응답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일상언어가 단순히 어휘의 의미관념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해서는 곤란하다.
2.2. 언어의 정보표현능력
1) 부정적 측면
'불립문자'는 잘 알려진 선의 구호이다. 그런데 왜 '문자를 세우지 않는가' 하는 점에 있어 흔히들 "언어는 마음의 미묘한 곳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상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역으로 말하자면, 언어란 일상생활상의 많은 부분들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선의 핵심만은 전달할 수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문제점을 생각해보자.
① 선 논리상의 모순
논의를 간단히 하기 위해 다소 도식적으로 표시하면 이러하다.
일상생활의 일상적 행위, 생각 →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음
마음의 미묘한 곳 → 언어로 표현할 수없음
평상심시도 → 행주좌와어묵동정이 모두 마음의 발현 → 언어로 표현 가능? 불가능?
그러므로 '불립문자'의 경지와 그렇지 않은 경지를 구분한다는 것은 결국 '배 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불 쬐는 것'이 '도'라고 하는 선의 기본 종지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② 체험적 내용을 전달할 수 없음
그 때 야구공에 맞았는데 아팠다.
이런 문장을 접하면 '아팠다'는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것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말하는 화자 자신도 그 때의 아픔을 지금은 느끼지 않고 있는데 하물며 청자가 화자의 아픔에 대해서 뭔가를 '전달'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선, 언어, 선학>에서는 "체험에 관한 기술과 설명은 다양할 수가 있지만, 어떤 설명도 체험 그 자체일 수는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③ 부차적 인식작용을 유도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 문장을 하나 접했다고 하자.
허물어져 가는 집이 한 채 있다.
이 말에 대해서도 청자는 허물어져 가는 집을 한 채 연상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만큼 이 문장은 일정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첫째. 허물어져 가는 집이 집인가?
집이란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건물로서, 가족 생활의 터전"이라는 것이 사전적인 의미이다. 그렇다면 '허물어져 사람이 살 수 없는 어떤 구조물'을 '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둘째, 분별적 인식과 셋째, 가치 개입의 문제
'허물어져 가는 집'이라고 말하는 순간 원형의 멀쩡한 집에 상대되는 허물진 집, 또 집인 것과 집 아닌 것, 하나인 것과 하나 아닌 것 등으로 분별적인 인식이 생겨나게 된다.
아울러, 대개의 경우 '허물어져 가는 집'이란 말을 듣는 순간 청자는 '딱 좋다, 훌륭하다, 적합하다'라기 보다는 '정상이 아니다, 버려졌다, 찜찜하다'라는 느낌까지 함께 갖기 마련이다. '허물어져 가는 집' 그 자체는 그냥 그 곳에 존재하는 하나의 구조물일 뿐인데 이것이 말로 표현되는 순간 사람들의 가치가 개입되는 것이다.
넷째. 정도성의 문제
다른 것들을 다 인정한다 하더라도 도대체 '허물어져 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인가? 기둥도 두 개만 남고 벽은 다 무너진 것인지, 집은 멀쩡하고 유리나 문짝 떨어져 나갔는데 사는 사람이 없어 버려진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만약 말만 듣고 실상을 우리가 알 수 있다면 '현장답사'는 필요 없을 것이다.
④ 일상생활의 오해들
대화를 하다 보면 의도치 않았던 오해가 발생하거나, 서로 간에 엉뚱하게 이해하는 '논점절취'의 경우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러한 예들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므로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차별계'에서 언어가 어떤 생각이나 현실을 '전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현상은 발생할 수 없거나 적어도 드물게 발생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국 문자가 '전달'할 수 있는 경지와 그렇지 않은 경지가 따로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사실 현상의 모든 면에 있어 언어문자는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周裕 는 '불립문자'의 이런 특성을 단적으로 대승불교의 般若空觀에서 찾고 있으며 "언어는 본체가 비존재(虛無)"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2) 긍정적 측면
이상에서 언어를 통해서는 '실제'를 '전달'할 수 없음을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언어는 정보전달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여기에서 몇가지 사항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① 실제와 언어의 차이
중요한 것은 '현상'과 '언어'는 각각 체계가 다르다는 점이다. 요컨대 언어는 '지하철 노선도'에 비교할 수 있다. 지하철 노선도는 실제 지하철 노선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그것과 똑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선도가 실제 노선의 모양과 꼭 같지 않다고 해서 불편할 것은 없으며 오히려 단순화된 덕으로 보기에는 더 편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지하철의 실제 노선에는 그 실제 노선의 논리가 있으며 지하철 노선도에는 노선도의 논리가 있어 이 둘은 일정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각기 다른 체계 위에 건립되어 있는 것이다.
선과 '불립문자'라는 명제가 지적하는 것은 언어가 마음의 미묘한 곳을 지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언어는 현상과는 또 다른 별개의 체계로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언어일 뿐이지 실상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② 정보의 '표현'과 '전달'의 차이
언어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도 아니고 바람과 파도 같은 물리적인 존재물도 아니며 법과 도덕 같은 '약속, 제도'일 뿐이다. 언어와 그 언어로 표현될 정보는 모두 사람들의 머리 속에 들어 있을 뿐이며,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뿐이며 직접 '전달'하지는 않는 것이다.
2.3. 선학에 대한 일상언어적 접근 : 모순어법의 예
여기에서 말하는 '어법'이란 '문법(grammar)'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모순어법(oxymoron)'은 '역설'의 하위 부류라 할 수 있고, '모순형용'과는 다른 것이지만 이들 용어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서는 이들을 대략 통털어 앞 뒤 모순적으로 구성된 어휘나 문장을 '모순어법'에 포함시킬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쾌락의 고통', '삶 속의 죽음', '바쁠수록 천천히', '시원섭섭하다', '소리 없는 아우성', '찬란한 슬픔' …… 등이며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이고,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이다', '침묵이 만개의 뇌성소리 (유마경)', '선은 선이 아니다 (청담스님)' … 등도 모두 모순어법의 예가 된다.
그러나 굳이 이러한 문학이나 철학, 종교의 표현에서가 아니라 일상언어에서도 문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모순어법을 필수적으로 빌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위에서 말한 '허물어져 가는 집'도 그러한 예가 될 것이고, 결혼식에서 '신랑입장'이라고 하는 것 (결혼식이 끝나야 신랑이고 아직은 총각이다), 좀 기우뚱하게 그려진 원을 보고 '원을 좀 더 둥글게 그려라'라고 말하는 것 등은 말의 편의상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엄밀하게 말한다고 해서 "네가 원이라고 그린 원을 닮은 그 도형을 좀 더 둥글게 그려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실제로 이렇게 말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오히려 알아 듣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상언어가 단순히 표면적인 어휘만 따라가는 것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상용되는 정도에 따라 '모순어법'과 일상언어로 갈린다고 할 수 있으며, 어느 쪽으로 인정되든 모순어법적인 표현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소간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1)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선종 역사에서 '돈점'논쟁은 비교적 역사가 오래되었고 아직도 진행 중인 논쟁의 하나이다. 그런 만큼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있는데, 나는 이들을 검토하고 이 논쟁에 참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두 어휘는 내부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용어에 대한 이해도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돈오점수'는 물론 일반적인 구조인 반면, '돈오돈수'는 모순어법적 구조이다. 왜냐하면 일상언어에서 '修' 즉 '수행'이란 '지속적인 시간'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지속 시간'의 의미를 갖지 않는 '頓'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頓修'의 '修'와 '漸修'의 '修'는 개념이 다소간에 다른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점수'의 '修'는 현재 미완성 상태이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修'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돈수'의 '修'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상태로서 한 순간 한 순간 깨어 있는 것 자체가 곧 수행이라는 의미로서 일상적인 '修'의 의미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에서는 "혜능의 돈오돈수가 다만 돈오를 말하고 있을 뿐이지 점수적 의미에서 수행에 관한 언급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몇 가지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돈수'는 아무래도 이미 깨달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둘째. '돈수'는 당위적인 말이다.
셋째. '점수'는 깨달은 뒤의 수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넷째. 점수는 언젠가 완성되는 때 (점수가 끝나는 때)가 있지만, '돈수'는 끊임없는 '돈'의 연결이므로 결국 끝나는 때가 없다.
2) 불립문자
어떤 표현이 그 자체 속에 자신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면 대개는 모순어법을 구성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 거나, "어떤 크레타 섬 사람이 '모든 크레타 섬 사람은 거짓말쟁이야'라고 말했다"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어법적 표현에 대해 일상언어 혹은 문학언어와 논리학은 접근 방법이 서로 다르다. 일상언어에서는 상대방이 '무의미한 소리'를 지껄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그 말 속 보다 심층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그 의미 파악에 주력하게 된다. 반면 철학에서는 명제의 진리값을 판별할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을 가진다.
'자기지칭' 모순어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 중에 하나가 '메타 언어(기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언급을 다른 언급 보다 '상위'에 있는 것, 다른 언급에 대해 '기준' 되는 것으로 인정하여 동일선에서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이 법칙은 다른 여타의 예외 있는 법칙들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그 '예외성'에 관해 함께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경찰이 법을 집행하기 위해 초법적인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이러한 '메타 언어'이론은 논리 언어와 일상 언어의 타협안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며 논리학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불립문자'라는 말은 모순어법의 예가 아닌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불립문자'라는 말 자체가 '문자'이므로 '자기지칭'인 모순어법의 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대한 '선학'의 접근은 일상언어적인지 논리학적인지 상당히 애매한 면이 있다. 문제는 '불립문자'라는 구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메타 언어'적 성격 때문인지 선학의 글쓰기에서 간혹 '메타 언어'적인 글쓰기가 눈에 띈다는 것이다. 이 예에 대해서는 아래 3장 2절 '화두 해설의 문제'에 제시하고 있다. '학문'에 있어 자신의 말은 메타 언어이고 남의 논리는 대상 언어로 간주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논리전개방법이 아닐까 한다.
3) 법화경의 서술구조
서술 구조는 경전 내용의 본질이 아니지만 사상적 가치에 대해서는 그간 많이 강조된 만큼 내용 이외의 방향에서 특색을 한 번 생각 해 보고자 한다. 불교의 경전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도 독특한 서술구조를 가지며 경전들 간에도 제 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런 특징들 중에 하나는 일부 경전이 '자기언급적 서술구조'를 가진다는 점이고, 그 대표적 예로 <<묘법연화경>>을 제시할 수 있을 듯 하다. '자기언급적 서술구조'를 가진다는 것은 <<법화경>> 속에 '<<법화경>>을 설법한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구조는 대략 이러하다.
<서품>과 <방편품>은 <<법화경>>을 설하기 직전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것"이라는 말이 언급되므로 당시 기사굴산의 회상에서 <<법화경>>을 설하시기 이전에 불교 최상승의 도리로 <<법화경>>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또 일월등명불, 대통지승여래 등과 같이 과거의 여러 부처님들이 모두 <<법화경>>을 설했다는 구절에서 역시 <<법화경>>이 마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경전 (혹은 가르침의 내용)인 것처럼 언급되고 있다.
<비유품>에서는 <<법화경>>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불승(一佛乘)' 개념이 등장하지만 서술구조로만 보면 왜 부처님께서 삼승의 교리로 사람을 가르쳤는지에 대한 설법을 사리불이 간청하고 부처님이 응낙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즉 기존에 존재하는 <<법화경>>의 내용이 아니라 설법 장소에서의 구체적인 사건인 것이다. 이후 <<법화경>>의 장, 절(品)은 모두 이러한 설법현장에서 일어난 일들로 진행되고 있다. <오백제자수기품>, <수학무학인기품> 등도 그러하거니와 <견보탑품>, <종지용출품> 등에서 이런 특색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여래수량품>에서는 설법을 듣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생긴 의문, 즉 부처님의 수명에 관한 의문을 해결해주는 것으로서 이 역시 설법현장에서의 일이다.
<권지품>은 설법 듣고 있는 제자들의 결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 <제바달다품>에서는 아예 <<법화경>>에 관해 문수보살, 지적보살, 사리불의 토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분별공덕품> 역시 앞서는 <여래수량품>의 설법을 듣고 견처의 변화가 생기는 것이 전제 되어 있으며, 이 <분별공덕품> 외에 <법사품>, <법사공덕품> 등은 <<법화경>>을 수지, 독송, 서사 하는 등의 공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처음에 '<<법화경>>을 설한다'고 하였을 때의 <<법화경>>, 대통지승불이 8천겁 동안이나 설법했다는 <<법화경>> (화성유품)은 과연 설한 것일까 아닐까? 복잡한 논의는 삭제하고 형식논리로 따지자면 '<<법화경>>을 설한다'고 했을 때의 <<법화경>>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법화경>>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법화경>>에는 <<법화경>>의 내용이 없는 것이다.
물론 <<법화경>>의 기록자가 이런 서사구조를 통해 또 다른 것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독자로서는 이런 서사구조로부터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는 것도 흥미있을 것이다.
첫째. <<법화경>>의 서술구조는 자기지칭적이다.
둘째. '불립문자'를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셋째. 삼라만상 모두가 부처님의 설법이다.
넷째. 중중무진의 화엄세계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3. 서로 다른 체계들
위에서 본 것처럼 언어란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것과 꼭 같지는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매개로 하여 건립되는 학문 역시 언어, 세계와는 존재양식이 또 다른 것이다. '선수행'과 '선학' 역시 존재양식이 각기 다르다. 선학의 주요 연구 대상, 연구 자료는 결국 '선어록'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남의 집 살림살이 따지기'로서 자신의 마음공부인 '선수행'과는 일정한 차이를 인정해야 옳을 것이다. 최근에 제기 되었던 두 가지 논쟁의 사례를 통해 학문으로서의 '선학'의 한계와 지향점을 논하고자 한다.
3.1 간화선토론
근래에 우리나라의 선의 주된 수행법인 '간화선'에 대해 여러 가지 의론이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조계사와 불교신문사가 공동주최한 "간화선 대토론회"에서 발표된 두 논문을 대상으로 살펴 볼 것인데, 내가 '간화선'의 유효성 여부에 대해 토론하려는 것은 아니다.
요점만 지적하자면 <간화선 수행과 공안공부의 문제>는 '조주의 무자 공안'만이 진정한 화두라는 것이고 <한국불교의 새화두 : 간화와 돈오를 넘어>는 간화만이 유일한 수행법이 아닐 뿐 아니라 '돈오'라는 미명 아래 수행을 등한히 하는 악습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형식논리로 볼 때 '간화선' 역시 '모순어법' 표현이다. '선'이란 말 앞에 '간화'란 어휘가 붙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며, '평상심이 도'이고 일상생활이 곧 자성의 발현이라고 하면서 따로이 '참선'공부를 설정하며 깨달음을 위해서는 '참선, 좌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인 것이다. 나아가 화두가 이미 뚫린 사람은 참선할 때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리적인 모순이 반드시 현실적인 모순상황으로 나타나느냐하는 것이다. 선승들의 경험으로 보아 간화선이 깨달음을 여는 길이 된다면 간화선이 가지고 있는 형식논리상의 모순은 또 다른 논리에 의해 '설명'을 요청받는 것이며 이런 것이 '학문'이 할 일일 것이다. 예를 들어, '윤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사실 '無記'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무수한 시도가 이루어져 왔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간화선'에 대해서도 이러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논문은 사실 '학문'적 토론의 범위를 넘어 서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떠한 조직이라도 그 조직의 활동목표 및 활동방법을 정해놓는 법이다. 한국의 조계종은 '교종'이 아니라 '선종'이며 그 수행방법은 '간화선'이라는 것은 조계종단의 기본전제인데 왜 '선'만 강조하느냐, 왜 '간화'만 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논의의 편의상 '돈오돈수'의 '돈수'를 잠깐 접어 두면, '수행'이라는 것은 '경험'의 범위에 속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주장은 이러이러하게 수행하면 어떠어떠한 능력을 갖게 된다라는 식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 수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면 ① 간화선으로 수행해서 제대로 깨달은 사람을 못 봤다 ② 최소한 근자에는 간화선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없다 등으로 문제가 제기 되어야 하며 그 대안도 ① 누가 경전을 열심히 읽었는데 깨달았다 ② 누가 계율을 열심히 지켰는데 깨달았다 등으로 실제 사례에 근거해서 제시되어야 할 것이며, 가장 좋은 방식은 ③ 내가 이러하게 수행해서 깨달았으니 이렇게 수행하라는 형식일 것이다. 물론 대안 ①, ②는 '조계종단'에게 조계종단이기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학인에게 어떤 화두를 내릴 것인가의 문제는 한 집안의 가풍문제로서 학술적인 주장의 대상인지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물론 <간화와 돈오를 넘어>의 경우 '간화선'에 대한 문제제기라기 보다는 조계종단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불교계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수행법에 관한 한 대안 제시가 미흡하고 '간화선' 자체에 대한 찬반론이 주요 쟁점으로 부각하면서 불교계의 문제 같은 것은 오히려 뒷전에 밀리고 있다. 결국 발표자가 학술적으로 제기할 부분과 그렇지 않는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의 논점을 잃어버리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3.2 선문답의 해설 문제
변상섭은 <<김용옥선생 그건 아니올시다>>에서 선어록을 해설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였고, 이 책의 서평을 통해 신규탁이 반론을 제기함으로 해서 선어록이 해설 가능한지의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게 되었다.
나는 원칙적으로 화두란 해설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김용옥이 <<벽암록>>을 해설한 것에 대해 "경축, 선종사상 최초의 어리석은 바보 출현"이라고 비난할만큼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변상섭의 위 책은 단지 김용옥의 두 가지 책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데 책 한권을 과연 '서평'처럼 꾸미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서술구조로는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체계적으로 서술하기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화두해설행위에 대한 비판만 하더라도 이 책에서 김용옥의 <<벽암록>> 해설만 문제로 삼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일본서적에서는 화두를 공공연히 해설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신규탁, 한형조, 이은윤, 정성본, 김태완 등의 저서에서 화두가 해설되고 있고 목정배교수도 학술발표회 토론석에서 그런 예를 '자연스럽게' 제기한 적이 있는 만큼 화두에 대한 해설은 이미 공개화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변상섭의 관점에서 보기로 한다면, 김용옥 보다도 이은윤의 해설이 字句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더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변상섭이 화두해설행위에 대해 비판한다면 이러한 흐름 전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광범위한 사례 수집과 차분한 논리 전개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상섭은 김용옥만을 문제로 삼았기 때문에 변상섭의 문제제기는 한편으로 적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학계 전체의 토론대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화두를 해설하는 행위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비겁한 양비론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화두를 해설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화두를 해설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도 할 수 없다고 본다. 사실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상섭은 선어록을 '번역은 해야 하지만 해설 해선 안된다'고 하였는데 '번역'과 '해설'이 딱 부러지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간과하고 있다. 분별적인 사고 작용이 없이 번역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변상섭 자신도 화두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지고 해설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그는 "내가 지금 이렇게 김용옥선생을 뒤따라 화두에 대해 왈가왈부 말하고 있는 것은 다만 도올 선생이 저질러 놓은 잘못을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을 보면 변상섭이 자신의 서술은 '메타 언어'이고 남의 서술은 '대상 언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결국 화두에 대한 번역에 있어 견해 차이가 있을 경우 '논리적으로 따지는 과정'이 필요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적으로 따지는 과정'에서 화두에 대한 해설이 동반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연구성과가 <<선학대사전>>으로 집대성되는 것이다. 만약 화두를 해설해선 안된다는 원칙을 극단적으로 추종한다면 <<선학대사전>>에서 어휘의 절반 정도는 내다 버려야 할 것이다.
결국 문제는 학술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옳든 그르든 화두에 대한 해설 행위는 점차 많아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화두를 해설하지 않는다는 미명아래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이나, 선어록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으로 책을 편집하는 행위, 화두를 구체적인 사회환경과 분리시켜 절대화 시키는 것 등도 결코 칭찬 받을 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그것이 '본질'은 아니라는 전제에 아래 화두에 대한 학술적인 토론의 장을 열어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4. 결론
'선'에 있어 '부차적'으로 취급되기 쉬운 문제들에 대해 '선학'에서는 답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 아래 '일상언어'와 '선학'의 관계에 대해 몇가지 사례들을 살펴 보았다. 또 이러한 고찰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사상적 측면'에서만 고찰해온 여러 대상들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도 고찰할 여지가 있음을 보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현상'과 '언어'는 일정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서로 존재체계가 다른 것이며, 그런 만큼 '선'과 그에 대한 학문적 연구인 '선학' 역시 서로 별개의 체계임을 보였다. '선 언어'가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언급'이라면 '선학'은 '그 언급'에 대한 연구일 따름인 것이다. 학문은 그 연구의 대상과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때 오히려 그 학문의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선학에 대한 일상언어적 접근'에 있어 '모순어법' 외에 몇 가지 사례들, 예를 들어 왜 질문에는 꼭 대답을 하는지, 주인공 외에 조연들의 역할은 무시해도 좋은지 등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지만 분량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 참고문헌
현각스님 편, <<선학강의-선종사부록->>, 불일출판사, 1998. 순천.
이청담, 이혜성 저, <<선입문>>, 아카데미, 1975, 서울.
홍정식 저, <<법화경요해>>, 대한불교천태종총무원, 1986.
周裕 저, <<禪宗語言>>, 浙江人民出版社, 1999. 절강성 항주.
김태완 저,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 장경각, 2001, 서울.
야나기다 세이잔 저, 추만호 · 안영길 역, <<선의 사상과 역사>>, 민족사, 1991, 서울.
변상섭 저, <<김용옥선생 그건 아니올시다>>, 시공사, 2000, 서울.
랄프 파솔드 저, 황적륜 외 공역, <<사회언어학>>, 한신문화사, 1994, 서울.
*학술회의 발표논문*
김태완 저, <선, 언어, 선학 -좋은 선학을 위한 하나의 모색>, 한국선학회 제10차 정기학술회의 발표문, 2001년 3월 17일, 동국대 학술문화관 덕암세미나실
정성본 <간화선 수행과 공안공부의 문제>, 간화선 대토론회 발표논문, 2000년 10월 24일, 조계사 대웅전
도법스님 <왜 간화선인가>, 간화선 대토론회 약정토론문, 2000년 10월 24일, 조계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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