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의 『 만들어진 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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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발췌 -----------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 저]
신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용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p381 중에서
우리가 인종 차별 등의 편견을 주장하면 의례 그 편견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하지만 종교인에게 신앙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면 당신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꼴이 된다.
구약성서의 신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자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어린 자식들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로 나온다.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천진무구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더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기독교를 잘 알고 있었던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 기독교의 신은 잔인하고 복수심 많고 변덕스럽고 불공평한, 끔찍한 성격을 지닌 존재다”라고 하였을 정도이다.
우리 문화의 중심부에는 일신교라는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거대한 악이 자리하고 있다. 구약성서라는 야만적인 청동기 시대의 문헌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3가지의 반 인간적인 종교가 나왔다(고어 바이델).
유대교는 원래 사막부족의 배타성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유독 사나운 신을 섬기는 한 부족의 신앙이었다. 바울은 이 보다는 덜 무자비하며 덜 배타적인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기독교를 창시하였다. 몇 세기 뒤 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유대교 본연의 비타협적인 일신교로 회귀하여 이슬람을 창시하고,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을 차용하여 코란을 만들고 군사 정복을 통해 신앙을 전파한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덧붙였다.
종교가 과학의 영토에 발을 들여 놓고 현실 세계에 관여하는 순간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기적이 없는 종교는 대다수의 유신론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임을 유념하자. 기적도 없고 기도자에게 응답도 하지 않는 신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기도하다’ 라는 동사에 대한 Ambrose Bierce의 재치 있는 정의가 있다.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을 무효화 하라고 요구하는 것.”
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신에 대한 막연한 정의를 내렸을 뿐이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그 외에 아무런 증거도 없는 말장난일 뿐이다.
논리학자들은 전능과 전지가 상호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신이 전지하다면, 그는 자신의 전능을 발휘하여 우주 역사의 경로에 미리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개입하겠다고 이미 마음 먹은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즉, 신은 역사에 개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샘 해리스가 <신앙의 종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에게는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갖가지 믿음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그들의 믿음이 대단히 흔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종교적’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미친’, ‘정신병적’, ‘망상’이라고 부를 가능성이 높다~~~. 수가 많으면 분명 제정신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우주의 창조자가 당신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그가 모르스 부호처럼 빗방울로 창문을 두드려 당신에게 이야기 한다는 믿음은 정신병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적인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종교인은 일반적으로 미치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절대적으로 미친 짓이다”.
종교적 의도가 스며든 사례로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당시의 전설과 헤롯왕이 유아들을 대량 학살한 당시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예수의 사후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는 예수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예언에 따라 (미가서 5장 2절)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추종자들이 놀랐다고 언급하고 있다. 누가는 Caesar Augustus가 과세 목적으로 모든 유대인들을 자신의 동네로 돌아가라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말한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으므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다윗이 실존 인물이라면 예수보다 거의 1,000 년 전의 인물이다. 도대체 로마인들이 요셉에게 1,000 년 전에 조상이 살았던 땅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할 필요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실제로 인구조사가 있었지만 이것은 헤롯왕이 사망한 후인 서기 6년의 일이었다.
아무튼 예수가 정말로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면, 요셉의 족보는 그와 아무 상관도 없으므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예수에게 맞추기 위해 요셉의 족보를 동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다빈치 코드>와 복음서들의 유일한 차이는 복음서들이 오래된 소설인 반면, <다빈치 코드>는 현대 소설이라는 것뿐이다.
설계론자(혹은 창조론자)들의 비개연성 논증이 공격하는 지점은 크게 네 곳이다.
물리법칙들이 조금만 달랐어도 우주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었을터인데, 어떻게 물리법칙들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는가?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지금과 조금 달랐거나, 지구의 자전궤도가 조금만 더 타원이었거나, 목성이라는 거대한 중력 방어막이 없었다면 지구에는 생명이 살 수 없었을터인데, 어떻게 지구가 딱 이와 같은 환경을 갖추게 되었을까?
원시 지구에서 어떻게 생명이 우연히 탄생할 확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어떻게 지구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원시 생명체가 어떻게 지금과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유기체로 변할 수 있었는가?
설계논증에 의하면 위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초월적 설계자에 즉, 신에 의해서"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1,2,3번에 대해서는 "인본 원리"로, 4번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아이는 “악어가 있는 강에서 헤엄치지 말라”는 좋은 조언이지만 “보름달이 뜰 때 염소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는 기껏해야 시간과 염소를 낭비하는 조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태평양 멜라네시아와 뉴기니의 화물 숭배 의식은 실제 사례이다.
20세기 초의 식민지 개척과 2차 대전을 전후하여, 섬 주민들은 경이로운 물건들을 쓰는 백인들이 결코 그것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수리가 필요하면 백인들은 물건을 멀리 보냈고, 배나 나중에는 비행기의 '화물'로 새 물건들이 계속 도착했다. 백인들은 물건을 만들거나 수선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고, 유용성이 있어 보이는 행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책상 뒤에 앉아서 서류를 만지작 거리는 행위는 일종의 종교 의식처럼 보인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화물은 초자연적인 기원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그 점을 확인해주려는 듯, 백인들은 종교 의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특정한 행동들을 했다:
그들은 높다란 기둥을 세우고 전선을 매달았다. 그들은 불빛을 반짝이며 신기한 잡음과 억눌린 목소리를 흘려보내는 작은 상자들 앞에 앉아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동네 주민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고 위 아래로 행진하라고 시켰다. 그보다 더 쓸모없는 짓은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원주민들은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백인들이 신에게 화물을 보내달라고 올리는 의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원주민도 화물을 원한다면,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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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위한 제단 가짜비행기, 가짜관제탑...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종류의 의식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문화적 교류 없이) 수십차례 발생했다는 것이며, 그 의식들 사이에 상당한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뉴칼레도니아에서 두 번, 솔로몬 제도에서 네 번, 피지에서 네 번, 뉴헤브리디스에서 일곱 번, 뉴기니에서 50번 이상 독자적으로 그런 의식이 출현했으며, 대부분은 아무 연관도 없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종교들은 대부분 메시아가 묵시록의 날에 화물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이한 책
성경의 상당 부분은 그저 기이할 뿐이다. 수 많은 익명의 저자, 편집자, 필사자 등이 9세기에 걸쳐 지리 멸렬한 문서들을 혼란스럽게 엮고 짓고 수정하고 번역하고 왜곡하고 개정한 선집이다. 성경을 곧이곧대로 도덕의 근간으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읽지 않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구약성서
우리는 성서에서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그렇게 취사선택하는 행위는 무신론자가 절대적인 근거 없이 이 도덕규정이나 저 도덕규정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판단 문제이다.
‘롯이 산에 올라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이튿날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들어가 아비와 동침하니라.’
이 일그러진 가족이 소돔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면 신과 그의 천벌에 공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롯과 소돔의 이야기는 <판관기> 19장에서 섬뜩하게 반복된다.
‘이름 모를 사제가 첩과 함께 기브아로 여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노인의 집에서 후한 접대를 받으며 묵었다. 그 때 남자들이 몰려 와서 노인에게 남자 손님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했다. 알아 볼 것이 있다, 즉 비역질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롯과 똑 같은 말을 했다.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의 첩이 있소. 그들을 내어 줄 테니 욕보이든 마음대로 하시오. 결국 사제는 그의 첩을 내어주었고, 폭도들은 밤새도록 그녀를 집단 강간하였다. 동이 틀 무렵 그녀는 남편이 머무는 집 앞에 와서 쓰러졌고 아침에 이를 발견한 사제는 “일어나라. 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 있었다. 사제는 칼을 들어 첩을 뼈째로 열두 조각으로 잘라서 이스라엘의 모든 해안으로 보냈다.’ 이는 신성한 경전의 출처가 잡다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브라함은 세 개의 위대한 일신교의 창시자였다. 아브라함은 기근에서 벗어나고자 아내인 사라와 이집트로 갔다. 아내가 이집트인들이 탐낼 만큼 아름다운 여성인지라 남편인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를 여동생인체 하기로 했다. 미모에 힘입어 그녀는 파라오의 할렘에 들어 갔고 아브라함은 파라오의 총애를 받아 부자가 되었다. 신은 이런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파라오와 그의 일가에 전염병을 퍼뜨렸다(왜 아브라함에게 퍼뜨리지 않았을까?). 파라오는 결국 아브라함을 이집트에서 내 쫓았다(창세기 12장 18-19절).
기이한 점은 그 부부가 나중에 똑 같은 술수를 쓰려 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랄의 왕이 대상이었다. 그도 아브라함의 권유로 사라와 결혼했다. 그 역시 나중에는 파라오와 똑 같은 말로 분노를 표현했다. 이 유사성이 원문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그러한 불쾌한 이야기들은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는 일화에 비하면 사소하다 (이슬람 경전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인공은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만들고 장작을 쌓은 뒤 칼을 손에 쥐었을 때에 극적으로 천사가 개입하여 그의 믿음을 시험했음을 알린다. 하지만 현대의 도덕주의자는 그런 심리적 외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아동학대이며 권력에 의한 핍박이다.
<판관기> 11장에 등장하는 입다는 신과 거래를 했다. 암몬군을 이기게 해주면 집으로 돌아 갈 때에 누가 맨 처음 문을 열고 마중을 나오든 그를 제물로 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입다는 정말 암몬군을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외동 딸이 춤을 추면서 그를 맞이하러 나왔다. 입다는 울부짖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딸은 순순히 제물이 되겠다고 했다. 그녀는 처녀로 죽은 것이 안타까우니 두 달간 산에 가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만 하였다. 두 달 후, 그녀는 돌아 왔고 입다는 딸을 불태웠다. 신은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었다.
<민수기>에는 신이 모세를 시켜 미디안인들을 공격하도록 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의 군대는 순식간에 모든 남자들을 살해했지만 여자와 아이들은 죽이지 않았다. 병사들의 이 자애로운 행동에 분개한 모세는 남자들과 처녀가 아닌 여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남자를 알지 못한 여자 아이들은 너희를 위해 살려 두어라”. 십계명을 가져왔다는 모세는 현대의 도덕주의자를 위한 역할 모델이 아니다.
……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헐고 석상을 깨뜨리고 목상을 잘라버려라. 너희는 다른 신을 섬기
지 말아라.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탈출기 34장 13-17절>
…… 훌륭하고 노련한 여호수아는 남녀노소, 소와 양, 나귀 등 도시의 모든 것을 칼로 철저히 몰살시킬 때까지 쉬지 않았다<여호수아서 6장 21절>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파괴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약속의 땅을 침략하는 과정을 담은 성경의 이야기는 히틀러의 폴란드 침략, 후세인의 쿠르드 족과 습지 아랍인의 대량학살과 도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성경이 인상적이고 시적인 작품일 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도덕을 함양하라고 권해 줄만한 책은 아니다.
<레위기> 20장에 따르면 다음의 죄들은 죽음의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부모를 비방하는 것, 불륜, 동성애, 수간, 안식일에 일하는 것 등등. <민수기> 15장에는 안식일에 한 남자가 장작을 모으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잡아 신에게 어떻게 처리할 지를 물었다. 신은 모세에게 그를 처형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돌로 쳐죽였다.
우리가 십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다른 신의 숭배와 우상 제작이 가장 큰 죄가 된다. 그러면 바미얀의 불상을 파괴한 탈레반들을 비난하기 보다는 그들의 강직한 신앙심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우상숭배는 원칙적으로 참수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나는 메카나 노틀담, 동양의 사찰들, 바미얀의 석불들을 불도저로 밀어 버릴 무신론자가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미국의 물리학자 Steven Weinberg는 이런 말을 했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악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파스칼도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질 때에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우리가 성경에서 도덕을 이끌어냈다면 우리는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킬 것이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처형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을 처형할 것이다
신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되는 대신에 그냥 용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굳이 그렇게 하여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예수 살해자”라고 박해 받고 수 백만 명이 학살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 인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John Hartung은 예수는 구원을 받을 자신의 內集團을 엄격하게 유대인으로 한정했다고 말한다. 또 “너희는 살인하지 마라” 는 유대인을 죽이지 말라는 구체적인 의미였다. ‘네 이웃’과 관련된 계명들은 모두 똑같이 배타적이다. 12세기의 랍비였던 Moses Maimonides는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누군가가 이스라엘인을 죽이면 계율을 위배한 것이다. 하지만 이교도를 죽이면 처형되지 않는다.” 하텅은 유대최고법원이 내놓은 말도 인용한다. 동물이나 이교도를 죽이려다 이스라엘인을 죽이면 무죄라는 것이다. 또, ‘봉인된(구원된)’ 사람의 수가 14만 4천명이라고 한정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의 내용은 유대인 12부족에서 각각 12,000명을 뽑은 것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이들 모두 여자에게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뜻은 그들 중에 여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종교는 분명히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며, 그것이 종교에 가해지는 주된 비난 중 하나이다. 인도가 분리될 당시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폭동으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누가 누구를 살해할지를 정하는 꼬리표는 종교적인 것밖에 없었다.
세네카는 “종교는 평민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들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라고 했다.
교황 피오12세는 나치스와 맞서라는 요구를 줄기차게 거부했다. 그 문제는 지금도 가톨릭 계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1939년 11월 뮌헨에서 히틀러 암살 미수가 있은 후, 뮌헨 대주교였던 파울하버 추기경은 성당에서 히틀러의 안전에 감사하는 기도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나는 무신론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이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이다. 신앙은 그 어떠한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디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가질 수 없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의사가 믿음이 독실한 환자에게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이야기해주면 왜 그녀의 침대 옆이 모인 독실한 문병객들은 먼저 떠난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이것 저것 주문하지 않는 것인가. “ 로버트 삼촌을 만나면 우리 모두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세요….”
안락사와 조력 자살을 가장 소리 높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종교인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인들이 세속적인 삶에 집착할 가능성이 가장 낮아야 한다. 모든 살인을 죄라고 하지만 불쌍한 환자의 천국 여행을 진심으로 돕는다고 믿으면 왜 그것이 죄가 되는가?
안락사나 조력자살에 저항해야 할 사람들은 죽음을 轉移가 아니라 종말로 보는 우리 같은 무신론자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지지한다.
오랜 세월 동안 노인들의 죽음을 지켜 본 한 간호사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종교인이라고 한다. 그것은 종교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로할 힘을 지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