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술 수련기, 그리고 붙이는 말 (← http://soobahk.or.kr)
최희석(8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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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23년 10월 서울 태생으로, 지금 광희초등학교 정문
앞에 우리 집이 있었다. 왜정치하에 보통학교와 중고등학교
를 다녔고, 이어 한양공대 토목공학과에 들어가 제 1회로
졸업하였다. 짧지 않은 기간 철도청 근무를 뒤로 무술사범의
길을 걸어 온 나는, 평생 큰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고 또 고생한
아내를 먼저 보내야 했으니 성공한 삶은 아닐텐데, 아직 건강
하여 어디든 다닐 수 있으니 그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자랑
거리라고 해야 할까. ......................................................
나이 어려서 일본인이 가르치던 학교에서 배운,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봄 꿈에 취해있다 보니 뜰앞 오동나무에 벌써 가을이 온 것을
아지 못했구나" 하는 싯귀가 떠오른다. 이제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뒷사람을 위해 여기에 나의 수련기를
조금 적어 남기려 한다. ..................................................
때는 일제시대라, 학교를 마치고 무슨 희망같은 것을 펴려해도
마음대로 될 것은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때부터 유도를 했는데,
무슨 생각이었든지 어느날 소공동에 있던 강도관 유도장(?)을
찾아가, "나도 수련하고 싶습니다" 했다. 대답은 "안돼"였다.
"왜요?" 물으니 "4단 이상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만 잊혀지고 말았다. ...........................................
얼마 뒤 미군의 도움으로 우리가 독립이 되자, 나는 철도청에
취직을 하였다. 용산역 옆의 서울사무소가 근무지였는데,
어느날 철도병원옆 경리국 창고에서 기합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된다. 가서 보니 4-5명이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강도관에서 본 그 공수도가 아닌가. 그 해 11월경 나는, 직장
동료이자 지도자인 황기씨의 신입회원이 되었고 또 그것을
당수로 부른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황기씨는 그동안 만주
철도에 있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와 경리국 조사과 심사계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
어쨌든 바로 다음 날 정각 12시부터 점심시간에 수련했는데,
나는 보통 매일 거의 두 시간씩, 어느 날은 하루 종일 했다.
처음에는 수련복도 없이 하다가, 뒤에 광목으로 지어 입었다.
이것은 땀에 젖으면 마치 물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몸에 들어
붙고 또 잘 찢어졌다. 누비고 꿰매기를 몇 번, 뒤에는 미군부대
에서 나온 포대로 옷을 지어 입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
매일의 수련은 기본기와 기초동작이었는데, 족기(발)단련을
위해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등을 했다. 가끔 한강 모래밭에서
이단 앞차기 등을 연습했는데 중심잡기가 어려웠다. 수기(손)
단련은, 하루에 단련대를 양손으로 1,500번씩 치는 걸로 했다.
겨울에는 단련대 주변의 눈이 모두 녹았고 몸에서는 김이 피어
올랐다. 물론 몇 개의 수련틀도 연습하였다. .......................
처음에는 심사라는 걸 생각지 않았으나, 봄과 가을 연 2회의
심사를 받기로 하고, 차례로 8급, 6급, 5급, 3급, 2급, 1급이
되었다. 6급일 때는 철도공작창 광장의 시범대회에서, 손날로
1.5센치 정도 두께의 송판 3장을 부순 다음 9센치 길이의 못을
박고 또 적벽돌 1장도 손날로 깨어 많은 박수를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
드디어 수련 3년째인 1949년 4월 심사에서 나는 증서번호
3번의 1단 보유자가 되었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까지는
나를 포함해 오직 3명의 유단자가 있을 뿐 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는 부산으로 피난했고, 그 곳 초량에서 수련을
계속하다가 11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는 유도,
검도, 궁도장이 있었는데, 폭탄 폭풍으로 벽이 무너진 궁도장
옆 유도장이 우리가 수련할 수 있는 곳이었다. ......................
이듬해부터 서울이 수복되고 안정되면서 무덕관은, 명동에
있던 시공관, 지붕이 없던 장충체육관 등을 빌려 중국(대만),
일본, 필리핀, 말레이지아를 불러와 한국 최초의 국제적인
무술연무대회를 가졌는데 그 때 나는 임원주심을 맡았었다.
그 즈음 공군본부, 해군본부 등에도 나가 수련을 지도하였고,
나중에는 모교에서 또 내가 살던 집 일부를 고쳐 수련장으로
만들어 몇 백 명씩 가르쳐야 할 만큼 인기를 얻기도 했다.
천규덕, 신한승, 지한재씨를 만난 것도 이 무렵. ...................
나의 무술 수련과 지도는 5.16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함께
태권도 명칭 사용을 강제받으며 점차 희미해졌으나, 전통의
무덕관 역사에서 현재까지 최고위라고 할 9단을 받고
심사위원장을 오래 역임한 것은 나의 기쁜 추억의 하나가
될 것이다. ....................................................................
처음 무덕관을 열었던 황기씨가 고인이 된 뒤, 갈 곳을 몰라
하던 많은 무덕관 출신 인사들, 특히 산넘고 바다건너 세계
각지를 개척한 우리의 해외진출 사범들, 또 국내의 여러가지
어려운 현실과 싸워가며 흐르는 땀만으로 삶을 지탱해 온
지도자들 - 여러분을 위해 문을 연 국제수박연합, 그 울타리
안에서 이제 마음껏 형제애를 나누고 또 함께 미래를
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3. 7.12.)
비영리법인 국제수박연합
기술자문위원회 의장
최희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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